2017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너는 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니?”
그러자 “저는 오른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와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정작은 본인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하긴 전에 어떤 책을 보니, 우리 몸의 좌우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몸을 반으로 나눈 뒤에 좌측이나 우측의 한 부분을 복사해서 반대쪽으로 붙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더 예쁜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저는 아무리 거울을 봐도 왼쪽이 더 나은지, 오른쪽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기 힘들까요?
이 친구는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 오랫동안 계속 자신이 찍힌 사진이나 화면을 보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마음이 드는 부분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얼굴도 이렇게 계속 보고 고민해야 겨우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본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말하고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하느님께서도 벌하실 거야.”
우리 주변에서, 또 스스로도 자주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더 큰 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왕실 가족의 타락한 윤리 행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사실 그를 감옥에 가둔 헤로데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춰서 헤로데 본인과 손님들을 기쁘게 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이렇게 맹세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이 맹세에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지요. 헤로데는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 청을 들어줍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라는 작은 죄가 더 큰 죄인 살인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섣부르게 함부로 말한 판단이라는 작은 죄가 더 큰 죄인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섣부른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벤자민 디즈레일리).
손나무(‘좋은 생각’ 중에서)
제자가 물었다.
“가장 값진 열매를 맺는 나무는 무엇입니까?”
스승이 답했다.
“한 그루에 가지가 다섯 개씩 달린 나무가 있는데, 그걸 부지런히 흔들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네. 바로 자네의 손이지.”
가장 값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남의 나무에 달린 열매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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