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호호글라라 2017. 8. 17. 14:11

2017년 8월 17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구절입니다.

 

“여성은 자신의 존재를 ‘관계’를 통해 찾는 반면, 남성은 자신의 존재를 ‘지위’를 통해 확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남성과 여성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소통의 방식, 관계를 맺는 방식, 삶을 이해하는 방식 모두가 현저하게 다르다.”

 

여성과 남성이 이러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차이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있을까요? 각 개인의 차이 역시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후배가 있었습니다. 신학생이었는데 좋게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이었고, 나쁘게 보면 사치를 일삼는 모습이었지요.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하던 시기에 ‘삐삐’를 혼자 들고 다녔고, 사람들이 ‘삐삐’를 들고 다닐 때에는 벽돌 정도의 크기의 휴대전화를 들고 다녔습니다. 머리 모양도 자유롭게 하고, 옷 역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아주 이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많이 혼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부끄럽고 미안한 것은 혼냈던 이유들을 저 역시 나중에는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해?”, “나는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우리들이 참으로 많이 쓰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쓰는 이유는 바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문제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를 말이지요. 즉, ‘인간으로서는 같다.’는 전제에서 만남을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는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아마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히 용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충분한 용서라는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용서,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앞서도 말했듯이 일곱 번이나 용서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를 향해 “왜 그렇게 행동해?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할 만큼 충분히 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단 한 분은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인간으로서 모두 똑같기 때문에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의 명언: 너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너보다 강하거나 약했다. 그가 너보다 약했으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너보다 강했으면 너 자신을 용서하라.(세네카) 

 

 

상상 속의 청중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심리학자 데이비드 엘킨드의 연구 중에 청소년기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상상 속의 청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행동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이지요. 예를 들어서, 13세의 남자 아이가 아무도 모르는 작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이 한 실수를 두고 전교생이 쑤군거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자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이나 결석을 하게 되지요. 또한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서 평가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침마다 지금 당장 무대에 올라가는 배우처럼 거울 앞에서 오랜 시간을 꾸미는 십대 소녀도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청소년기의 특징적인 현상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이 시기를 거쳐 온 사람은 어느 정도 여전히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겸손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고 또 스스로도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겠다는 마음이 강한 것이고, 그래서 겸손의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인정받으려는 마음보다 인정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요? 사랑받으려는 마음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분명히 또 다른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