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 숫자가 글쎄 전 세계 4위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을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그만큼 우리나라가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많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축복은 상상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상력은 꿈 꿀 수 있는 힘이고, 이를 통해 희망을 품고 또 그 희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울증 환자가 많아질까요? 상상력이 없어져서일까요?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즉, 긍정적이고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부정적이고 절망을 바라보는데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큰 선물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상상력이 오히려 하느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께서 기도 중에 분심이 너무 많이 든다면서, 이 분심 때문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면서 분심 퇴치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더군요. 분심 퇴치의 방법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지요.
“그 분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고, 그 분심 안에 계신 주님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주님과 대화해보세요.”
분심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까요? 어디에나 다 계시는 주님께서는 이 분심 안에서도 계시기에 그 안에서도 충분히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심 자체에 너무 깊이 빠져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분심으로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만나면 모든 상상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희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해당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죄를 지은 형제를 처음에는 단둘이, 그 다음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리고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향해서 몇 단계에 걸린 계속된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력이 그냥 가능할까요?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마음을 간직해야만 가능합니다.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면서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희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아이가 어른의 불완전함을 깨달으면 청소년이 된다. 어른을 용서할 줄 알면 어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할 줄 알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앨든 나우랜드).
노인의 지혜(최천호)
오래전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원에서 불이 나더니 마을을 향해 사방에서 덮쳐오는 거센 불길에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모두에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큰 원을 그려 그 안에 불을 지르자!”
마을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노인이 말대로 했습니다. 불에 타버린 공간이 어느 정도 나타나자, 노인이 외쳤습니다.
“모두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시오!”
노인은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다시 불이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마을 사람들을 지혜로 무사히 구해내었습니다.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다양한 정보습득으로 지식수준이 높다 하나, 인생을 살면서 몸소 배운 ‘진짜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삶의 지혜를 인정할 수 있고 또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