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동조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단의 압력에 따라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명확한 답을 알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사람들에게 틀린 답이 답인 것처럼 대답하겠습니다. 처음에 몇몇 사람들은 오답을 말하는 사람들을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역시 틀린 답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해서 틀린 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 역시 그러한 체험을 하나 했습니다. 식당에 갔는데 소위 미식가라는 소리를 듣는 한 사람이 반찬 중의 하나를 가리키면서 약간 상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역시 살짝 맛을 보더니 “상한 것 맞네.”라고 동조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호기심 많은 또 다른 사람 역시 상했다고 말했고, 몇몇 사람은 아예 그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인에게 살짝 물어본 결과 반찬인 나물이 원래 쌉쌀한 맛이 날 뿐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조현상의 핵심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같은 답을 할 때, 그 상황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이를 실험했는데,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 집단이 있는 경우 점점 감소해서 동조율이 75%까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지만, 무조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옳다면 사회적 압박을 뚫고서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선택을 통해 이제까지 불합리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압박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못하면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을 대하는 밭 임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부터 일한 사람, 그리고 계속해서 아홉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부터 일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일당을 계산하는데 이 밭 임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나눠줍니다. 이 모습을 그 누구도 정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한 양이 다른데 똑같은 임금을 준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밭 임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밭 임자는 당시 사람들이 하루를 먹고 살기에 필요한 한 데나리온을 줘야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에 기초로 생각하시고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소수 집단이라도 형성되어진다면, 점점 세상 사람들이 바뀌고 세상 전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슴으로 살아갈 때, 그대의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된다(혜광).
다른 사람의 시선
어떤 책에서 재미있는 질문 하나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질문을 똑같이 던져 보겠습니다.
“이번 여름에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수영하러 가기로 한 당신, 당신이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뭐라고 답하시겠습니다. 물론 여러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수영복을 산다.’, 또는 ‘수영복을 찾아둔다.’가 대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이어트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대답이 많았을까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에 유독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일 나’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가장 중요한 수영복을 준비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남에게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대학에서 이러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먼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잠시 머물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 지를 보는 것이었지요. 이 옷을 입은 사람의 대다수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알아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옷을 기억하는 사람은 단지 23%에 불과 했습니다.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보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더 많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