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신부님께서 예전에 제가 드렸던 예화모음 파일을 다시 좀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모아놓았던 자료인데, 같이 공유하려고 몇 년 전에 그 신부님께 드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신부님께 다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료를 저 혼자 쓰기 위해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의 실수로 이 파일을 컴퓨터에서 삭제해서 아예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 당시에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그리고 정말로 많은 자료를 주제별로 모았기 때문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복원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더한 일도 있는데 뭘 신경 써.’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넘어갔습니다.
지금 현재 제가 모아놓은 예화집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어지길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모로 편할 수는 있겠지만, 이 예화의 틀에 갇힐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예화집이 없다보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그마한 것에도 관심과 관찰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새로운 생각과 다양한 묵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화집이 없는 편이 훨씬 더 이롭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어떤 것에 갇혀 있을 때, 그곳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갇혀 있을 때, 이웃을 향한 사랑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도 힘들게 됩니다. 즉, ‘내 것’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주님의 것인 ‘사랑’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초대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를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쉬울까요? 또한 내게 별 이득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초대해서 대접한다는 것 역시 이 세상의 상식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않아야 하늘에서 보답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우리들이 이 세상의 것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갈 때,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벌거벗은 빈 몸으로 왔듯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아무것도 없는 빈 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뜻에 맞게 한 사랑의 행위들이 인정을 받아 가장 큰 보답을 받는 순간이 하늘나라에서입니다. 그곳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것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철학은 열심히 흘른 땀에서부터 생겨나며, 마음은 매일의 노동을 통해 연마된다(이나모리 가즈오).
밥 한 그릇을 보면서
우리가 매 식사 때마다 만나게 되는 ‘밥’ 한 그릇을 생각해봅니다. 매일 먹다보니 너무 쉽게 생각하지만, 밥이 제 앞에 놓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또한 밥이 놓이기까지 도움을 준 것들 역시 어마어마하지요. 비, 햇살, 흙, 물, 구슬땀을 흘린 농부, 그리고 밥을 정성껏 지은 이 역시 있습니다. 이 정도만 있으면 밥이 제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니지요. 더 많은 것들이 그리고 더 많은 도움을 통해서 밥이 우리의 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감사할 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 우리,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인 ‘사랑’을 늘 힘주어서 강조하셨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