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호호글라라 2017. 11. 19. 23:34

2017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컴퓨터와 스마트폰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가 있습니다. 이 셋 중에서 서로 유사한 것을 묶는다면 어떤 것과 어떤 것을 고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고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크기, 편리함, 휴대성 등등 그 차이점은 셀 수 없이 많겠지요. 이제 컴퓨터와 강아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차이를 비롯해서 많은 차이점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다보면 아마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차이점과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컴퓨터와 강아지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괜히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싫은 이유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자신과 비슷해서 싫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더군요. 결국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삶의 주인이 바로 내 자신이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삶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살고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삶의 주인공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파견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뜻과 생각을 내세워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삶의 방향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아주 유명한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불러서 재산을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달렌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모두 두 배로 재산을 불렸지만, 한 종만이 그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었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사실 탈렌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한 탈렌트는 보통 금 33Kg을 의미하지요.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거의 4~5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한다는 것이고, 이렇게 누군가를 신뢰하는 사람이 모진 분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질다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지요.

 

자신이 삶이 너무나 힘들다고 하면서 주님을 모진 분으로 몰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땅 속에 묻어 놓았기에 모진 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맡겨놓은 것들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모진 분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할 때 우리 역시 주님께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의 명언: 풀이 죽어 있느니 활기찬 게 낫다. 동정할 바엔 사랑하고, 대체 가능한 것보다 독보적인 게 낫고, 똑같은 생각보다 다른 의견이 낫다. 이해관계보다 원칙이 먼저고, 원칙보다 인간이 먼저다(마빈 머드릭).

 


3등 칸에 탄 슈바이처 박사(인터넷에서 퍼온 글)

  

슈바이처 박사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의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덴마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신문기자들이 취재를 하려고 그가 탄 기차로 몰려들었다. 슈바이처는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은 귀족이다. 그래서 취재경쟁에 열중한 기자들이 한꺼번에 특등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보았으나,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일등칸으로 몰려가서 찾아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또다시 이등칸으로 가 봤으나, 거기서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모두 허탈한 나머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영국 기자 한 사람만이 혹시나 하고 3등 칸을 기웃거리다가 뜻밖에 거기서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꽉 끼어 앉아 있는 퀴퀴한 악취로 가득한 3등 칸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놀란 기자가 그에게 특등실로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으나 슈바이처 박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어떻게 3등 칸에 타셨습니까?"

"예, 이 기차는 4등 칸이 없어서요."

"아니 그게 아니고 선생님께서 어쩌자고 불편한 곳에서 고생하며 가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잠시 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특등실의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입니다.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닌다는 말, 어쩌면 우리들이 이 땅에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이유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