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호호글라라 2017. 12. 4. 09:28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어떤 수도승이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교부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자 바실리우스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시오.”

그러자 그 수도승은 즉시 떠나갔습니다. 20년 후에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제게 또 다른 말씀을 주십시오.”

그러자 바실리우스 교부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 역시 지키려고 순종하며 자기 독방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초대 사막의 교부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이 수도승이 바실리우스 교부의 말씀에 곧바로 순명하면서 지켰던 것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볼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이 사랑의 계명은 늘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만 같습니다.

그 옛날 교부들이 침묵과 단순함, 그리고 극기의 삶을 살았던 이유는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굳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금욕주의적인 삶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께 사랑과 믿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대단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종을 낫게 할 수 있는 분이며, 특히 한 마디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복잡한 세상에 젖어서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렸을 때, 흙장난을 하다가 개미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자신의 몸보다도 훨씬 큰 무엇인가를 들고서 가는 개미가 안쓰러워서 개미집 앞으로 옮겨주었습니다. 개미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제게 고마움을 표시했을까요? 갑작스러운 일에 놀랐는지 들고 가는 것도 내팽개치고서 어디론가 급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개미는 저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제가 내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볼 수도 없고 직접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보고 들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과연 사랑의 마음으로 보고 듣는 믿음일까요?


오늘의 명언: 돈의 만족보다 삶의 만족을 이루기가 더 쉽다. 돈의 만족만을 생각하니 삶의 만족도 놓치는 것이다.

 

 

두려움을 고백할 때 얻는 3가지 긍정적 효과


1) “나도 두렵다.”라고 말하는 친구를 얻게 된다. 비슷한 두려움을 공유함으로써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

2) 관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3) 자기 위안이 아니라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용기 있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약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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